2025년 3월 개봉한 ‘스트리밍’은 실시간 범죄 콘텐츠가 대중의 흥밋거리가 되어버린 시대,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심리 스릴러다. 미제 사건을 쫓는 스트리머라는 설정을 통해, 단순한 사건 해결 이상의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누가 범죄를 만들고 누가 소비하는가’라는 불편한 주제를 끌어올린다. 추적의 짜릿함과 무력감, 정의와 자극 사이의 긴장 속에서, 영화는 스릴러 이상의 감정적 깊이를 선사한다.
진실을 쫓는 콘텐츠, 혹은 콘텐츠를 위한 진실
‘스트리밍’은 단순히 범죄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범죄와 미디어, 진실과 소비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사는 시대의 위험한 감각을 들춰내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주인공 ‘우상’은 인기 있는 범죄 스트리머로, 실제 미제 사건을 파고드는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영상 조회수는 치솟고, 시청자들은 그의 추적 과정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그가 다루는 사건은 아직 누군가의 고통 속에 있는 미해결 범죄다. 영화는 스트리머라는 직업의 극단을 보여준다. 우상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정의감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콘텐츠가 대중의 피로와 욕망을 충족시킬수록 그는 점점 더 ‘보여주기 위한 추적’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내적 갈등, 책임감, 그리고 피로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냉철한 분석가이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지쳐가는 인간. 이 이중성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서사 축이다. 특히 영화는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범죄 소비’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한다. 실종된 사람의 가족이 콘텐츠의 일부가 되고, 증거가 썸네일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시대. ‘스트리밍’은 그 현실을 자극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매우 건조하고 사실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더 무겁다. 그래서 더 현실감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범인을 쫓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상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그는 점점 자신의 존재가 수사 행위인지, 연출 행위인지 혼란을 겪으며, 그 경계에서 무너져 간다. 이 심리적 무너짐은 클리셰 없는 전개 속에서 서서히 축적되며, 마지막까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스트리밍’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다. 그것은 추적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어디까지 사적 이익과 정의를 혼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 심리 드라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을 건넨다.
범죄와 시청률, 그 위험한 공모 관계
‘스트리밍’의 가장 강력한 긴장감은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그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충돌에서 비롯된다. 주인공 우상은 조회수를 얻기 위해 실시간으로 범죄를 분석하고, 사라진 피해자의 흔적을 좇는다. 하지만 그의 ‘수사’는 경찰의 영역이 아니며, 그저 개인의 방송 콘텐츠일 뿐이다. 영화는 이 설정을 통해 미디어의 무분별한 폭력성과 도덕적 회색지대를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하나의 인물처럼 묘사된다. “더 자극적인 걸 원해요”, “카메라를 더 가까이 대봐요”라는 채팅창 문구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집단 심리’를 상징하는 장치다. 우상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점점 더 몰아붙이고, 마침내 경계를 넘는 순간에 이른다. 카메라는 기록의 도구에서 증거의 도구로, 다시 폭력의 도구가 되어간다. 또한 이 작품은 전개 중반부터 ‘정의감’이라는 단어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을 쫓았던 우상이 어느 순간부터는 ‘진실을 완성시키기 위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영화는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는 증거를 찾기보다는, 증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에 빠진다. 그때부터 ‘스트리밍’은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진실과 거짓 사이의 심리 스릴러로 전환된다. 영화는 고요한 연출로 이 혼란을 표현한다. 사건은 크지만,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화면은 흔들리지 않는다. 카메라 워킹 대신 정적인 롱테이크가 많고, 감정의 폭발 대신 침묵과 정적이 인물의 무게를 표현한다. 관객은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인물의 선택을 직시해야 하며, 이는 오히려 더 강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결국 ‘스트리밍’은 시청자와 주인공, 피해자와 범죄자, 방송과 현실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미세하게 보여주며, 현대 사회의 ‘리얼타임 콘텐츠’가 가진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이 모든 서사가 너무 낯익고, 너무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진실은 콘텐츠가 아니다 – 시청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
‘스트리밍’은 관객에게 어떤 해결책이나 교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끝까지 불편함을 유지한 채,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물음은 우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의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 향한다. 결국 이 작품은 인간이 진실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날카롭게 묻는 영화다. 피해자의 가족이 실시간 콘텐츠로 등장하고, 사건의 현장이 흥미로운 배경으로 소비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우상은 끝내 무너지고, 그의 채널은 꺼지지만, 화면을 보던 수십만의 시청자는 남아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다음 콘텐츠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관객은 무언가 놓친 것 같지만, 동시에 너무 많이 본 것 같기도 하다. 진실을 본 것인지, 만들어진 장면을 본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불분명함 속에, 영화는 가장 강한 질문을 숨겨둔다. ‘스트리밍’은 단순히 범죄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스크롤’하고 ‘공유’하며, 때로는 ‘평가’하고 있는지를 말없이 지적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조용한 경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더 또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