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는 아리 애스터 감독이 연출한 심리 호러 영화로, 스웨덴의 이교도 축제를 배경으로 인간 관계의 해체와 슬픔, 정체성의 재구성을 섬뜩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전통적인 어둠 속 공포가 아닌 찬란한 햇살 아래 벌어지는 불편한 장면들, 그리고 무력한 인간 심리를 정밀하게 해부하는 연출은 이 영화를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선 심리극으로 만든다. 사랑과 상실, 공동체와 희생의 모티프가 교묘히 얽혀 있다.
슬픔의 균열에서 시작된 여정, 한낮의 축제가 된 악몽
‘미드소마(Midsommar)’는 2019년 아리 애스터 감독이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영화로, 전작 ‘유전(Hereditary)’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 못지않게 충격적인 심리 호러 영화다. 영화는 전통적인 공포 영화가 사용하는 어두움과 음습함이 아닌, 오히려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벌어지는 ‘낯선 불안’을 중심에 둔다. 이러한 설정만으로도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며, 이 작품은 끝내 그 배반을 공포로 치환해낸다. 영화의 주인공 다니(플로렌스 퓨)는 가족을 잃는 참혹한 사건을 겪고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 그녀의 연인은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이며, 다니는 관계의 끝을 감지하면서도 홀로 그 관계를 붙잡는다. 이러한 정서적 고립 상태는 그녀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감정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감정의 고립과 무너지는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다. 다니는 연인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의 외딴 마을에서 열리는 '미드소마' 축제에 참여하게 된다. 축제는 밝고 화사하며, 모두가 친절하고 환대하는 공동체지만, 그 이면에는 외부인을 희생양 삼는 의식이 숨겨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니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공동체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유일한 존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가족과 연인에게서 소외된 그녀에게 이 마을은 모순적이게도 '안식처'처럼 다가온다. ‘미드소마’는 그렇게 다니의 내면을 천천히 따라가며, 그녀가 겪는 고통과 분노, 해방의 욕망을 외부 세계인 ‘축제’라는 장치를 통해 극화한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점점 다니가 그 기이한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처음에는 피해자처럼 보였던 그녀가, 영화가 끝날 무렵엔 가장 기이한 존재로 바뀌는 이 전환은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납득 가능하게 전개된다.
관계의 해체와 공동체의 유혹, 감정이 이끄는 폭력성
‘미드소마’는 전형적인 슬래셔 무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영화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현대 사회와 전통 사회,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크리스티안 일행은 연구와 체험을 명분 삼아 이교도의 공동체에 발을 들이고, 그들은 하나둘씩 사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그 죽음을 공포의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의 일환으로, 불가피한 순환으로 그린다. 다니와 크리스티안의 관계는 영화 내내 균열을 드러낸다. 크리스티안은 무관심하고 회피적이며, 다니는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적 불균형은 영화 후반부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티안이 의식에 의해 강제로 마을 여성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조차도 일반적인 감정적 충돌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을 여성들이 함께 울고, 다니 역시 함께 통곡하면서 분노를 ‘공감’의 형태로 표출한다. 이 장면은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의 작동을 보여주며, 다니가 점점 공동체에 귀속되어 가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결국 영화는 다니가 '메이 퀸'으로 선출되며 절정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여왕 선출이 아니라, 그녀가 새로운 가족, 새로운 세계에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희생’을 선택하는 순간, 공포는 다시 한번 전복된다. 우리는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녀의 입장에서 해방을 축하해야 할까? 아리 애스터는 이 영화에서 전통적 공포의 도구들을 철저히 해체하고, 대신 정서적 파편과 관계의 잔해를 통해 진짜 공포를 구축한다. 이는 시끄럽고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천천히 파고드는 불안이다. 공포의 외형을 갖지 않은 공포, 그것이 ‘미드소마’의 정체다. 음악과 색감, 의상, 풍경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가 주제와 완벽하게 맞물린다. 흰색 의상과 햇살 가득한 마을, 들꽃과 초록빛 숲은 전형적인 공포와는 거리가 멀지만, 바로 그 이질감이 영화의 긴장을 조율한다. 거대한 햇살 아래서 벌어지는 의식과 살인은, 무엇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해방인가 파괴인가 – 불편한 아름다움이 남긴 질문
‘미드소마’는 단순한 호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감정과, 그것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충돌하고 흡수되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의 심리극’이다. 특히 다니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슬픔, 상실, 분노, 외로움 같은 감정들이 어떻게 관계를 변화시키고, 어떻게 사람을 전혀 다른 존재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니는 미소 짓는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구원도 아니고, 완전한 승리도 아니다. 오히려 불편한 카타르시스, 모호한 해방의 얼굴이다. 관객은 그 미소 앞에서 안도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이중적 감정이야말로 ‘미드소마’가 전달하려는 진짜 메시지다. 아리 애스터는 이 영화를 통해 관계의 해체가 개인의 존재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공포는 누가 죽는가보다, 누가 남는가에 있다. 다니는 모두를 잃었지만, 결국 새로운 소속을 얻는다. 하지만 그 소속이 과연 구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억압인가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남겨진다. ‘미드소마’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공포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다름이 불편하고 기묘하면서도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이 영화는 끝난 후에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 관계,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야말로,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햇빛 아래의 공포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과 함께 존재하며, 때로는 미소 속에서, 꽃 속에서, 사랑 속에서 우리를 삼켜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