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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평범함 속의 시 한 줄,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조용한 기적

by heyni 2025. 3. 30.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은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와 그의 반복되는 일상 속 풍경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영화이다. 갈등이나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 작품은,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평범함을 관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 그리고 창작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위로하는지 은근하게 이야기한다. 시처럼 고요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일상 영화다.

오늘도 같은 시간, 같은 길… 하지만 전혀 같은 하루는 아니다

‘패터슨(Paterson)’은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안겨준다. 극적인 갈등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으며, 반전이나 눈물을 자극하는 장면도 없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어떤 편안함과 아련한 감정 속에 머물게 된다. 짐 자무쉬 감독은 이 영화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루하루가 같은 듯 보일 때, 그 안에 숨은 진짜 차이는 무엇일까?” 주인공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미국 뉴저지의 ‘패터슨’이라는 도시에 살며, 이름처럼 도시와 자신이 겹쳐진 인물이다. 그는 버스 운전사로서 하루하루 정해진 노선을 따라 일하고, 점심엔 항상 같은 장소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퇴근 후엔 아내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반복되는 일상.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시’를 쓴다. 주변 대화, 도시의 표지판, 창밖 풍경에서 느껴지는 인상, 물건의 배열 등… 그 어떤 사소한 것도 그의 감각을 자극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선’이다. 패터슨은 평범함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흥미롭게 꾸미거나 남들에게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공기, 사람들의 목소리, 거리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시로 남긴다. 그 시는 때론 단순하고, 때론 엉뚱하지만, 그 자체로 진실되다. 아내 로라는 창의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항상 무언가를 꾸미고 만들고 도전한다. 이 둘은 매우 대조적인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며 균형을 이룬다. 패터슨의 조용함과 로라의 생동감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자극하고 지지한다는 점이 이 영화의 숨은 로맨스다. ‘패터슨’은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강박에 지친 이 시대의 관객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하루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어쩌면 영화는, 한 편의 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삶’이 무엇인지 말해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는 건, 곧 살아 있다는 증거 – 일상이라는 무대 위의 창작자

‘패터슨’은 시와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시는 문학이 아니라 삶 자체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특별한 행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방식이다. 패터슨은 노트에 시를 쓰지만, 그것을 발표하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동을 기록하고 삶을 견디기 위한 방법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표현해낸다. 그는 작은 눈빛, 고개를 기울이는 방식, 짧은 한숨으로 모든 감정을 전달한다. 그의 말수는 적지만, 그 침묵이 시보다 더 시적이다. 패터슨은 말보다 관찰에 능하고, 반응보다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주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감동한다. 영화의 구조는 ‘일주일’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하루의 흐름이 반복된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대화, 다른 날씨, 다른 사건이 스쳐간다. 관객은 그 미세한 차이들을 통해 시간의 누적을 느끼게 되고, 그 누적이 모여 감정을 만든다. 이 반복은 리듬이 되고, 리듬은 음악이 되며, 결국 영화 전체가 하나의 시처럼 흐르게 된다.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마지막 날, 시집을 찢어버리는 사건이다. 패터슨의 노트를 한 사람이 찢어버렸다는 사실은 큰 사건처럼 다가오지 않지만, 관객은 그 상실의 무게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다시 새로운 노트를 받아들고, 첫 문장을 적는다. 이 장면은 패터슨이라는 인물의 정체성과 이 영화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시란 무엇인가? 다시 쓰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공간은 ‘버스’와 ‘집’이다. 이동과 고정, 외부와 내부를 상징하는 이 두 공간에서 패터슨은 모두 같은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어디서든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진짜 ‘행복’의 형태다. ‘패터슨’은 창작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영화다. 예술이란 꼭 거창하고 독특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그 시작은 관찰이고, 그 끝은 감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무덤덤한 하루들 속에서, 마음속에 피어나는 단어 하나

‘패터슨’은 조용히 말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시적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게 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곁에 머무르며, 우리가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눈물이 날 만큼 따뜻한 위로가 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창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냥 오늘 내가 느낀 것을 적어보는 것,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 혹은 조용히 바라보는 마음. 그 모든 것이 창작이며, 동시에 삶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패터슨은 시인이지만, 우리 모두도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다. 단지 표현하지 않을 뿐. 영화는 큰 결말 없이 끝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관객은 완성된 느낌을 받는다. 일상이란 본디 그렇다. 마무리 없이 다음으로 흘러가고, 그 안에서 우리는 단어 하나를 간직한다. 기억할 만한 날도, 특별한 말도 없지만, 무언가 남는다. 그게 바로 시의 본질이고, 삶의 한 단면이 아닐까. ‘패터슨’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바라보고, 기록하며, 담담하게 지나간다. 그 뒤에 남는 것은 고요한 감동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우리의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작고 반짝이는 시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우리 안에 오래 남는다.